투고일: 22. 7. 18
“오웬!”
자신을 소리쳐 부르는 굵은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상당히 밑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다소 거리감이 있지만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우렁차다. 딱딱하고 차가운 벽돌로 된 궁전의 벽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앉아 있었던 오웬은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곧바로 눈치챈다.
천천히 눈을 뜨면 수평으로 맞춘 시야에 3층의 고풍스러운 창문이 제일 먼저 들어온다. 고개를 기울여 창문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니, 때마침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던 하녀 한 명이 제 모습을 알아본다. 여자는 순식간에 공포에 질려 청소도구를 떨어뜨리고 비명을 지른다. 괴물이야, 집채만 한 거인이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사라지는 하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히죽 웃던 오웬의 시선이 창문을 떠나 밖으로 향한다. 자신뿐이었던 안뜰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은, 숨을 고르며 이마의 땀을 닦는 카인이다.
“드디어 찾아왔구나, 기사님.”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에는 커다란 달이 떠 있었다. 그 창백한 실루엣을 곁눈질한 오웬은 카인이 이곳에 찾아오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를 가늠해본다. 오늘은 유독 할 일이 없는 하루였다. 마법관을 적당히 어슬렁거리면서 눈에 띄는 마법사 두어 명을 골려 주다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때쯤 방을 나와 중앙의 왕궁 안뜰에 들어와서, 주문을 외우고, 커다래진 몸을 이끌고 앉아 태평스레 낮잠을 청했던 것이 기억난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솔직히, 거창한 이유 같은 건 그다지 없다. 이제 와서 그럴듯한 명분을 떠올려 써 붙이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그저 무료했을 뿐이다.
“콕로빈한테 듣고 달려온 거야. 안뜰에 커다래진 네가 있었다고 해서.”
오웬의 눈썹이 꿈틀, 동요한다.
“뭐야, 직접 나를 발견한 게 아니야? 재미없어.”
“의뢰가 있어서 국경 지역에 갔다 오는 길이니까 말이야.”
“아, 그러셔. 이젠 기사단장도 아닌 주제에 바빠 보이네.”
나 때문에 빼앗긴 지위의 공백을 일로 메우기라도 하고 싶은 거야, 뭐야? 평소라면 거리낌 없이 늘어놓았을 독설의 문장들을 목구멍 안쪽으로 꾸겨 넣은 오웬은 다시 왕궁 벽면에 몸을 기댄다. 딱히, 지금은 일방적인 투정에 가까운 말싸움을 걸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별다른 첨언 없이 입을 다물자 카인이 저에게 묻는다.
“왕궁에는 무슨 일이야? 허튼수작을 부릴 생각이라면 전력으로 막겠어.”
“딱히, 그럴 기분 아니거든. …그 허튼수작이라는 거, 기사님은 내가 잔뜩 부려줬으면 좋겠나 봐?”
“아니, 아니! 부탁이니까 얌전히 있어 줘.”
색이 다른 카인의 두 눈이 초조한 기색으로 오웬을 응시한다. 제 속내를 짐작해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오웬은 그런 카인을 속으로 힘껏 비웃으며 두 무릎을 모아 끌어안는다. 아무리 애써봤자 그가 원하는 만큼 깊은 곳까지는 알아낼 수 없다. 그야, 자신은 끌리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고 뚜렷한 동기는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는 이런 쪽으로 그리 능숙하지도 않다.
몇 초간의 무안한 정적이 흐르고, 경계심이 서려 있었던 카인의 시선이 조금 풀어진다.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어떻게든 짐작해낸 것 같았다. …혹은 별 근거도 없이 신뢰하기로 판단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미련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며 오웬은 눈매를 좁힌다.
“하여간 어서 원래대로 돌아와, 오웬. 왕궁 사람들이 무서워할 거야.”
“흐응, 싫어.”
“싫기는……. 고집부릴 일이 아니잖아.”
제 곁으로 다가온 카인이 기합을 넣고 주문을 외워 보아도 오웬의 몸은 그 상태 그대로이다. 당연히 그렇겠지. 오웬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기가 감돈다. 일상적인 사물의 크기를 조절하는 정도의 마법은 카인에게도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안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해진 오웬을 원래 크기로 돌려놓는 것은, 특히나 고된 의뢰를 마치고 돌아온 지금으로써는 절대로 무리다.
정신을 집중하며 주문을 외우는 헛짓거리를 두어 번 반복하고 나서야, 카인은 고개를 젓고는 한 발짝 물러난다. 현명한 판단이다. 아래로 기울어진 오웬의 시선이 카인에게로 가 꽂힌다. 그래, 그 방법은 포기해. 지금은 잔인하게 구는 것도 어쩐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언제까지고 성질을 부릴 마음은 없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서라도 인도적으로 해결하고 싶어 하는 기사님이 자신 앞에 엎드려 빌기라도 한다면 조금은 기분이 풀어질지도 모른다. 기대 아닌 기대를 하며 카인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녀석은 무척이나 달갑지 않은 말을 꺼낸다.
“설마 다른 마법사에게 저주라도 받은 거야? 그래서 고칠 수 없는 건가? 그런 거라면 오즈라도 데려올 테니까……,”
“아니, 시끄러워.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안 되는 게 아니라 싫은 거라고 했잖아.”
하필 오즈라니, 기사님은 사실은 누구보다 나를 죽이고 싶은 거지? 눈살을 찌푸리고 날 선 목소리로 대꾸하자 카인은 난처한 얼굴을 한다. 곤란할 것이다. 제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어떻게든 끝을 보고 싶겠지만, 나름의 배려가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쪽의 알 바는 아니다. 오웬은 무릎을 끌어안은 양팔에 힘을 준다.
“커지든 작아지든 내 마음이야.”
“오웬…….”
“아아, 정말이지 최악. 얼빠진 짓을 했더니 짜증만 나. 구더기가 들끓는 축축한 고깃덩이가 된 것 같은 기분.”
“너,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런 오싹한 표현이 남을 겁주는 거라고.”
어쩌라고, 네가 겁먹어 줄 것도 아니잖아. 솔직한 불평을 삼킨 오웬은 아주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한 사건을 회상한다. 기사님의 눈을 빼앗은 날, 그 눈에 손을 뻗었을 때 녀석의 얼굴에 엉망진창으로 덧칠되어 있었던 감정들을 기억한다. 전부는 읽을 수 없었지만, 그건 아마 패배감, 약간의 두려움과 절망 같은 것들이었을 테다. 오랜 세월 수많은 이들을 망가뜨리면서 숱하게 봐온, 자신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표정들이 거기에 있었다.
일그러진 환희는 거기까지였다. 카인은 두 번 다시 그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정정당당하게 대결해서 되찾아 주겠다는 소리나 멋대로 지껄이고, 뭐냐고. …지금도 그렇다. 앉은키가 왕궁보다 높을 만큼 커다랗게 된 자신과 마주했는데도 카인은 잠시 놀랄 뿐, 큰 동요의 기색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유 따윈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앙다문 입술이 굳어진다. 쥐락펴락할 수 없는 기사님은 화만 돋운다.
“자자, 나도 부탁을 받았으니 너를 원상 복귀시킬 의무가 있단 말이지. 기분이 안 좋은 거라면 요기라도 하면서 이야기할래? 그래, 마침 여기로 오는 길에 괜찮은 디저트 카페를 봤거든. 네 생각이 나서.”
“…….”
“일단 그 모습부터 어떻게 좀 해 봐. 직접 해제할 수 있는 마법이라면 어서……, 어어, 야!”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던 팔을 풀어낸 오웬은 카인에게로 손을 뻗는다. 손바닥에 뻣뻣한 옷의 감촉이 닿자, 재빨리 검지와 엄지로 녀석의 망토를 잡고 들어 올린다.
제법 건장한 체격을 가진 기사님도 거인이 된 북쪽의 마법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3층 높이까지 단숨에 떠오른 카인은 오웬의 두 손가락에 의지해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건 유복한 집안의 아기 요람 위에 둥둥 떠 있는 모빌 같기도 하고, 언젠가 꿈의 숲속에서 본 적 있는 목매단 이의 마지막 발버둥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건 조금 재밌는데. 한 손에 들어오는 기사님이라니.”
“위험하잖아, 오웬!”
“작아. 그리고 약해.”
“최소한 바닥에 내려놓고 얘기를……,”
“장난감 같아.”
그리 중얼거리는 오웬의 목소리는 묘하게 들떠 있어, 어딘가 천진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말문이 막힌 카인은 공중에 뜬 채 오웬을 응시하고, 오웬 역시 침묵하며 카인을 바라본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바람 한 줄기 불지 않는 안뜰을 비추는 재액의 달빛은 창백하게 푸르다.
장난감 기사님, 나쁘지 않은 어감이다. 지금이라면 녀석 하나쯤이야 마법을 쓰지 않고도 쉽게 찌부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정교한 관절로 이어진 고가의 장난감을 억지로 망가뜨리는 느낌이 되겠지. …언젠가는 정말로, 목숨만 붙여 놓고 그렇게 가지고 놀아 버릴까.
달빛에 푸르게 표백된 카인을 바라보며 온갖 짓궂은 장난을 상상하다가, 문득 맥이 빠져서 웃음이 새고 만다.
“…하지만 역시 같은 눈높이에서 보는 기사님이 더 좋아.”
카인을 덤불이 있는 쪽으로 적당히 던지자, 우악스러운 소리를 내며 풀썩 쓰러진다. 덤불 한가운데에 자빠진 카인이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시간도 주지 않고, 오웬은 말을 잇는다.
“디저트, 네가 사는 거지.”
“어어, 뭐……. 아니, 그것보다!”
“제안은 받아 둘게.”
오웬은 싫을 만큼 기세 좋은 웃음을 띠고 조용히 주문을 외운다. 잠깐, 오웬! 카인이 숙적의 이름을 부르며 허우적거리면서 겨우 덤불에서 빠져나온 것은, 그가 이미 안뜰에서 모습을 감춘 뒤다.
공간을 반쯤 차지하고 있던 것이 사라진 안뜰은 유난히 넓고, 또 허전하다. 카인은 말없이 장화에 들어간 덤불 잎을 털어내고,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한다. 공중에 떠올랐을 때 거칠게 뛰었던 심장이 진정될 때까지.
입을 열자, 멋쩍은 혼잣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변함없이 알 수가 없는 녀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