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린
썸네일
시행착오
사유
·
2026-02-06 20:15
다시는 실패하지 않도록

투고일: 기록x (20년도 쯤이었던 것 같아요)




달팽이를 키운 적이 있어요.

 

니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

건조한 주차장 아스팔트에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대로 진한 자국이 남았다. 멋들어진 필기체로 Be the Winner라고 적힌 파칭코 네온사인, 페인트 선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주차된 승용차들, 구석에 늘어선 주황색 고깔들……. 뒤에서는 아까부터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던 자동차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댔다. 지독한 매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깜박이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따라 니키를 내려다보는 린네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웠다 말았다 했다. 린네는 제 팔을 힘없이 흔들었다. 꽉 붙잡힌 손목이 희게 질려가고 있었다.

 

어이, 니키. 좀 비켜서서 얘기하자고.



저 없는 동안 식사 혼자 해결할 수 있어요?

어.

정말요? 전자레인지 어떻게 쓰는 건지 알아요?

네가 다섯 번은 가르쳐줬잖아. 날 뭐로 보는 거야.

누가 초인종 누르면 열어주면 안 돼요.

알았어.

다녀올게요.

어.

열어주면 안 돼요!

아 좀, 알았다고.

 

도시의 어린 요리사, 시이나 니키는 보살피는 것이 서툴렀다. 포장도로에 이제 막 발을 내디딘 참인 린네에게 모든 것을 하지 마세요, 해도 돼요, 해야 해요 세 가지로 설명했다. 가스레인지는 막 만지지 마세요. 배가 고프면 냉장고에서 아무거나 꺼내 먹어도 돼요. 더러워진 옷은 꼭 세탁기에 넣어야 해요. 하나하나 열심히 가르쳤지만 세심함이 조금 부족했다. 린네는 구체적인 이유도 듣지 못하고 집안에 홀로 남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일이 잦았다.

녀석은 동네 식당에서 일한다고 했다. 이제 기껏해야 고등학생 아닌가. 또래 녀석들은 다 똑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가던데. 이르네, 생각하며 니키의 침대에 누워 머리맡의 서랍을 뒤적거렸다. 쓰지 않는 휴대전화 충전선이나 잘 정돈해서 봉투 속에 넣어둔 비상금, 그리고 유명한 브랜드의 초콜릿 바 같은 것들뿐이었다. 책장을 올려다보면 액자 몇 장과 레시피북이 드문드문 전시되어 있을 뿐 대체로 텅 비어 있었다.

이 자식 지금껏 아이돌에는 정말 아무런 흥미도 없었구나. 초콜릿 바 포장지를 뜯으며 린네는 천장의 백열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구는 눈이 부셨고 벽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는 요란했다. 참으로 난잡한 문명이었다.

 

그날 집을 나선 건 따분하기 짝이 없는 생활에 지쳐서였다. 니키는 저녁 시간이 한참 넘어서야 귀가할 터였고, 그 녀석이 구해다 주는 아이돌 잡지는 매번 레퍼토리가 똑같아서 갈수록 참고할 가치가 떨어졌다. 고향에선 이럴 때 어떻게 했더라. 린네는 머리를 굴렸다.

 

ー 도서관 감. 돈 좀 빌린다. 일곱 시까진 밥 먹으러 돌아옴.

ー P.S 나 왠지 치킨 가라아게가 땡김.

 

모르는 것이 생기면 언제나 책에서 찾곤 했었다. 린네는 서랍 속에서 꺼낸 비상금 봉투를 잘 접어 주머니 속에 넣고 냉장고에 메모를 남겼다.

 

그러니까, 린네는 분명 도서관에 갈 생각이었다.

이른 새벽에 깬 탓이었을까, 깜박 잠든 사이에 버스는 종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린네는 급히 안내문을 확인했다. 여섯, 아니, 일곱 정거장 정도는 지나쳤으려나. 벌떡 일어나서 허둥지둥 요금을 계산하고 내리니 전혀 모르는 번화가 한복판이었다. 빽빽하게 늘어선 행인들, 승용차, 그리고 고층 건물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그 뒤로는 뚜렷한 기억이 없었다. 광원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처럼 무작정 가장 난잡하게 번쩍이는 건물을 찾아 들어갔다. 책에서 읽은 도시문명의 이상을 찾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혹은 안주하고 싶을 만큼 익숙해지기 시작한 일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거나.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둑어둑한 조명 속에 늘어선 기기들이 현란하게 빛을 발했다. 린네는 적당한 자리를 골라 기기 앞에 걸터앉았다.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접어 넣었던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지폐를 몇 장 꺼냈다. 홀린 듯이 천 엔짜리를 투입구에 집어넣고 버튼을 눌렀다.


쇠구슬이 쏟아져나오는 소리에 린네의 가슴이 요동쳤다.




야, 너는 슬롯머신에서 잭팟이 뜰 확률이 얼마라고 생각해?

 

열 시를 한참 넘긴 시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니키는 문 닫은 도서관 주변을 하염없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귀가하니 린네가 집에 없었다. 일곱 시 전까지 오겠다는 메모가 무색하도록 린네는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 식사 준비를 마치고 식탁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늦는다는 전화 한 통 없었다. 제 몫의 밥을 먼저 먹은 니키는 간단히 설거지를 하고 다시 옷을 입었다. 막연한 공포감이 들었다.

 

린네 군.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댄 니키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 시간을 넘게 돌아다녔어요. 도서관은 여섯 시에 문을 닫아요. 이 시간이면 가게들도 전부 문을 닫아요. 흉흉한 동네는 아니지만, 간혹 근방에 무서운 소문이 돌아요. 공중화장실 벽에는 기괴한 매매 전단지가 붙어요. 혹시 모르잖아요? 쏟아내고 싶은 말들을 꽁꽁 묶어 밀봉했다. 대신 심호흡을 하고 짧게 물었다.

 

지금 어디예요?



초등학교 사학년 때였어요.

 

니키는 벌건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요리에 쓸 채소를 씻다가 손톱만 한 달팽이가 나온 날이었어요. 아주 어렸을 적 곤충도감에서나 본 생물을 두 눈으로 직접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아버지께 허락을 맡고 상자를 구해다가 양배추 두어 조각이랑 같이 집어넣었어요. 구멍 뚫은 랩도 씌워놨죠. 손바닥만 해질 때까지 잘 키워줘야지, 멋대로 다짐하면서.

 

원래의 호흡을 되찾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니키의 목소리 사이에는 종종 딸꾹질이 섞였다. 린네는 붙잡힌 손을 접었다 폈다 해 보았다. 피가 잘 통하지 않았다.

 

달팽이는 금방 죽었어요. 숨구멍을 너무 크게 뚫어놨었나 봐요. 학교 갔다 오는 사이에……,

어어. 대충 짐작은 가네.

그래서 생각했어요. 다음엔 절대 죽게 놔두지 말자고. 책임지고 온 힘을 다해서 전심전력으로 아껴주자고.

……너 지금 얼굴 좀 무서운 거 알고 있냐?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리는 얼굴이 어딘가 흐리멍덩했다. 린네는 니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부러 큰소리쳤다.

 

그런 달팽이는 죽을 때까지 손톱만 하지, 멍청아. 걔가 거북이냐? 불쑥 크게.

저도 알아요! 그땐 어렸으니까…….

그리고 나 네 비상금 다 썼어.

파칭코 간판 보일 때부터 알아봤어요.

진짜 다 썼어. 완전 날렸어. 공중전화 쓸 때 넣은 십 엔이 마지막이었어. 하나도 안 남았어.

됐어요, 됐어. 괜찮으니까, 이제부턴 그런 거 하면 안 돼요.

 

고개를 저으며 돌아선 니키의 뒷모습은 오히려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손목을 붙들고 있던 힘이 차츰 약해졌다. 린네는 니키의 손을 뿌리쳤다.

 

그것보단 우리 빨리 돌아가요. 식사 준비해뒀는데 다 식었겠다. 치킨 가라아게는 따뜻할 때 먹어야 하는데…….

 

맥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칙칙한, 아무것도 되지 못하는 일상에 자리 잡고 싶지는 않았는데. 분명 그랬는데. 증명은 해줘야겠지, 그깟 달팽이 새끼보다야 내가 훨씬 질긴 놈이라는 걸. 그리고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내야지. 다짐을 했다.

주차장을 나가는 동안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린네는 땀으로 젖은 니키의 어깨에 팔을 걸고 뛰었다. 니키도 곧 린네의 걸음걸이에 맞춰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집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막차가 떠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