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일: 기록x (20년도 쯤이었던 것 같아요)
시이나 니키는 붉은 것에는 유독 사족을 못 썼다.
어렸을 때 언젠가 코피가 난 적이 있었다. 공원에서 또래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다 나무에 얼굴을 들이박았다. 아팠다. 코를 붙잡고 주저앉자 친구들이 달려와서 어깨를 붙잡았다. 얘 코피 나. 겁먹은 목소리들이 한데 모여 웅성거렸다. 니키는 느릿느릿 눈을 뜨고 제 손 위에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내려다보았다. 극명한 혈흔을 두 눈에 담은 것은, 기억하는 한 그때가 처음이었다.
손을 쥐락펴락 움직이는 대로 핏자국은 쉽게 살갗 위로 번져나갔다. 물과 유사한 질감이었지만 전혀 다른 종류였다. 진하고, 선명하고, 끈적하고, 아주 붉고 위험한……. 콧등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고통을 깜박 잊어버릴 만큼 황홀했다.
그건 정직한 욕구였다. 기묘한 황홀감에 호기심이 더해지자 피투성이의 손은 면죄부를 얻은 듯이 스르르 움직였다. 뜨겁게 흐르는 것을 훔쳐 입에 넣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야 넌 그걸 왜 먹어? 빨리 얘 엄마 데려오자. 어쩔 줄을 모르며 제 부모를 부르러 달려가는 또래 친구들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 프레임처럼 굼떴다.
혀에 닿는 감각은 아주 짜고 비렸다. 근처의 공사장에서 몇 번인가 맡아본 적 있는 지독한 쇠 냄새가 입가를 맴돌았다. 터질 듯이 요동치는 심장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맛도 향도 악질적이었다. 깊은 수렁에 서서히 잠겨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니키는 발버둥 치듯 고개를 들었다.
석양이 지기 시작한 하늘은 타오르는 붉은색이었다. 급히 눈길을 피해 닿은 공원의 벤치도 붉었다. 하늘을 담은 물웅덩이도 붉었다. 눈앞의 친구가 입은 셔츠의 색도 붉었다. 그리고 코에서는 새빨간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시선이 곤두박질쳤다. 망막에 붉게 얼룩지는 잔디가 맺혔다가 흐려졌다. 세상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무식하게 단조로웠던가?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한발 늦게 도착한 어머니가 어깨를 붙들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잔디 위에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건 먹는 게 아니란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저를 훈계하는 어머니의 눈에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니키는 제 코를 막은 솜을 톡톡 건드렸다. 겉으로 드러나는 출혈은 더는 없었지만, 침을 삼킬 때마다 아까 맛보았던 쇠붙이 같은 것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피와 혀, 붉은 것들. 니키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긴 소년처럼 자꾸만 부러 마른침을 삼켰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마라. 무단횡단을 하지 마라. 새치기를 하지 마라. 그런 가르침을 받을 때마다 어떤 청개구리 같은 녀석이 손을 들고 질문을 던지곤 했다. 하지만 선생님,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너무 많지 않나요?
그건 그 사람들이 나쁜 거야.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잖니, 자기 자신에게도 좋지 않고. 그런 식이었다. 언제나 선생들이 내놓는 근거는 비슷했다. 질문을 한 녀석은 그게 뭐냐며 핀잔을 주다 선생에게 꾸중을 듣고 얌전해졌다.
뒷자리에 앉아 있었던 니키는 선생의 간단한 대답을 곱씹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왜 그런 짓을 할까? 그저 나빠서? 나쁘다는 건 뭘까. 답지 않은 사색은 오래가지 않았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고, 선생이 교문을 열고 나가자 니키는 벌떡 일어섰다. 급식에 수박 화채가 나오는 날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붉은 음식을 찾았다. 토마토 스파게티나 레어 스테이크 같은 것들을 즐겨 먹었다. 붉다는 것 외의 미각적인 공통점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붉음, 그 자극적이면서도 가장 원초적인 색에 이상하리만치 끌렸을 뿐이었다. 지나가다 낯선 식당 차림표에 인쇄된 불그스름한 음식 사진을 보면 저도 모르게 멈춰 서서 문을 열었다. 디저트 카페에 진열된 레드벨벳 케이크를 응시하며 가만히 서 있기도 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직접 앞치마를 입고 프라이팬을 잡았다.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었다. 어쩌면 최후의 발악이었는지도 모른다.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나서부터 니키는 유난히 피를 보는 것을 꺼렸다. 칼을 다룰 땐 심혈을 기울였고, 피 튀기는 액션 영화를 멀리했다.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유년기의 어느 사소한 불행으로 발견하게 된 비도덕적 쾌락 중추를 숨겨야만 했다. 억누른 충동이 애꿎은 방향으로 뒤틀려 자라난 셈이었다. 다른 살아 숨 쉬는 누군가에게 그런 충동을 느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따라서 다소 기이한 습성으로 보이더라도 이렇게 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시간이 지나자 집착증은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집 주변의 어느 식당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간혹 주방 동료가 손을 베이거나, 술에 취한 손님들이 주먹다짐을 벌이다 피를 보기도 했다. 꼭 피가 아니더라도 무수히 많은 붉은 것들이 매일같이 시야에 들어왔다. 니키는 잘 참아냈다. 그다지 괴로운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 이젠 정말 괜찮아. 니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윗부분을 도려낸 딸기 하나를 씹어 삼켰다. 새콤달콤한 즙이 터져 나오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같이 둔탁하게 퍽퍽 터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약해졌다고는 해도, 그날 이후로 붉은 것과의 접촉은 언제나 그런 악질적인 희열감의 연장선에 있었다. 피곤하다면 피곤한 삶이었지만 한 번도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는 나쁜 사람일까.
니키는 가끔 침대에 누워서 그런 고민을 했다.
그날은 유달리 일이 늦게 끝났다. 일하는 식당에서 막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던 참이었고, 직원들은 셔터를 닫은 뒤 주방에 남아서 새 메뉴에 대한 의견을 공유했다. 요리가 중식 계열이니 고추기름을 사용하는 게 어떻겠냐는 니키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갈무리를 하고 나니 새벽 두 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분주히 가방을 챙겨서 식당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니키는 자신이 여전히 앞치마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에 가서 벗지 뭐. 아니, 벗을 것도 없지 않나. 식당은 월요일에만 쉬었으니 침대에 잠깐 쓰러졌다가 일어나면 곧 다시 출근 시간이 다가올 터였다. 규칙적인 시간표에 몸을 맞출 수 있는 점은 좋았으나 가끔 이렇게 평소의 패턴을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며칠간 피곤함에 찌들어버리곤 하는 것이 흠이었다.
집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으므로, 니키는 항상 출퇴근길을 두 다리로 걸었다. 번화가의 뒷골목을 따라 쭉 걸으면 금방이었다. 오래된 가로등 몇 개만 듬성듬성 들어서 있어서 제법 어둑어둑하지, 늦여름 새벽의 바람은 은근히 선선하지……. 가방을 메고 느긋하게 걷다 보니 저절로 눈꺼풀이 감겼다. 온갖 상념도 덩달아 질질 늘어지며 머리를 채웠다.
곧 월급이 들어온다. 통장이 두둑해지면 일단 먹고 싶었던 것들을 잔뜩 먹자. 사거리에 새로운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생겼다는데. 아, 이번 달에는 동창회도 있었지. 저축도 해야 하니 너무 흥청망청 써서는 안 되겠다. 예전에 한번은 대책 없이 식당 찾아 돌아다니다가 방세 낼 돈도 부족해져 버렸었고……,
“그 새끼 잡아!”
멀리서부터 골목길을 울리는 목소리에 니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기도 전에 무언가가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우악스레 비명을 쏟아내려던 입을 낯선 손바닥이 틀어막았다.
“소리 지르면 안 된다?”
걸걸한 목소리는 여태 전력 질주라도 했는지 호흡이 억눌려 있었다. 고장 난 가로등이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깜박거렸다. 점등과 암전이 반복되는 광경 속에서 니키는 제 입을 틀어막은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제대로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짙은 회색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의 얼굴에는 어두운 음영이 져 있었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담배 냄새 사이로 옅게나마 확연히 느껴지는 쇠붙이의 향이었다.
턱 막혔던 숨을 느리게 들이쉬었다. 명석하다 할 것도 없는 두뇌가 모처럼 빠르게 돌아갔다. 이 사람,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 범죄자일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나를 해칠 의도는 없는 것 같다. 아까 멀리에서 들려왔던 목소리의 주인은 엇갈린 건지 이쪽으로 오지 않는다. 그쯤에서 니키는 침착하게 남자의 팔을 두드렸다. 남자는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더니 별말 없이 손을 떼어 주었다.
“저기, 전 이제 이만…….”
“야.”
니키의 말을 자른 남자는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 쇠 냄새가 짙어지자 니키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냄새뿐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채우는 붉은 빛이 곤혹스러웠다.
“씨발, 아프게도 때리네. 제대로 얻어맞았으면 자빠져서 꼼짝없이 콩팥 털렸겠다.”
가로등 앞에 세워진 반사경을 거울삼아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대충 닦아낸 남자는 투덜대듯 몇 마디를 내뱉고는 웃었다. 경박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였다. 사람을 첫인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는 했지만, 니키로서는 평생을 상종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인간형일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니키는 도망치지 않았다. 아니, 도망칠 수 없었다. 남자가 후드 모자를 벗는 순간부터 호흡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가로등 불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붉은 머리칼과, 얼굴을 뒤덮은 것은 그 머리칼의 빛깔을 똑 닮은 피, 구순 새로 드러나는 새빨간 혀. 시선을 돌릴 공간도 여유도 없었다. 이걸, 이런 감각을, 뭐라 부르더라? 사고의 흐름이 뚝뚝 끊겨나갔다. 심장이 뛰었다.
“그러니까……, 니키.”
남자는 피 묻은 손으로 니키의 앞치마에 꽂힌 명찰을 두드렸다. 금속 재질의 명찰에 낯선 남자의 선혈이 번져나갔다. 니키는 고개를 들어 저를 호명한 남자와 눈을 맞췄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자의 눈에는 동요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너희 집 여기서 가깝냐?”
아, 수렁이다. 니키는 마른침을 삼켰다. 비린 맛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상상할 수 있었다. 자물쇠를 채워 두었던 충동심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이 남자와 엮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이성에겐 더는 발언권이 없었다. 입술은 요동치는 심장이 부추기는 대로 움직였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