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일: 23. 3. 9
지상고가 원중고한테 이긴 날의 이야기
“준수야.”
해가 저물어갈 때쯤 전영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 왜 전화하는데.”
“너 락커에 지갑 놓고 갔어.”
일 년, 어쩌면 더 오래됐을지도 모른다. 준수가 전학을 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뚝 끊겨버린 영중으로부터의 전화는 그리도 오래간만이었으나, 녀석의 용건은 무척 사소했다.
“와서 가져가.”
“아니, 야, 잠깐만……. 진짜 놓고 왔나?”
준수는 한 손으로 휴대전화를 든 채, 빈손으로 제 저지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다. 준수의 입에서 맥빠진 한숨이 샌다.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 건지.
“아이씨, 버스 정류장 다 왔는데.”
“…햄 지갑 여기 있는데요?”
준수 햄, 아까 저한테 지갑 맡기고 화장실 갔다 왔잖아요. 상호가 말을 걸어온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었다. 상호의 손에 들린 지갑은 확실히 자신의 것이다. 애초에 경기장 락커에 지갑만 따로 넣어둔 적은 없었다. 어 그러네. 자신의 지갑을 돌려받은 준수는 눈살을 찌푸린다. 전영중 이 새끼, 누구 놀리나. 준수가 영중을 다그치려던 순간, 전화기 스피커를 통해 녀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빨리 와.”
[ 전영중 너 무슨 일 있냐? ] - 7:04 PM 1
버스 정류장으로부터 체육관으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걷는 사이에 해는 졌고, 뺨을 때리는 바람이 조금 싸늘해졌다. 일행들을 먼저 버스에 태워 돌려보낸 준수는 십여 분쯤 전에 자신이 영중에게 보낸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답장은커녕 메시지 옆의 1 표시조차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이 새끼, 불러 놓고 뻔뻔하게 안읽씹이냐.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그 뒤로는 신경을 껐겠지만, 성준수는 오늘의 자신이 제법 감이 좋은 편이라고 자부했다. 빨리 와, 무미건조하게 흘러나온 녀석의 마지막 한마디에 어딘가 낯선 낌새가 서려 있었다.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올 때의 목소리와는 또 미묘하게 달랐다. 준수는 막연히 불안했다.
하루의 일정이 모두 끝난 뒤의 체육관은 어두컴컴하고 인기척 하나 없다. 체육관에 도착한 준수는 조급한 발걸음으로 농구장의 선수 대기실로 향한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 손이 연락처에서 영중의 번호를 찾는다. 푸른색 저지를 입게 된 뒤로는 오래도록 손대본 기억이 없는 전화 버튼을 누른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단조로운 전화 연결음은 오래도록 이어진다. 마침내 준수가 대기실 문 앞에 도착해서, 영중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문 틈새로 약하게 들리기 시작할 때쯤 연결음이 끊긴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전화 좀 받아라, 전영중 이 개…….”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순간, 준수의 말이 뚝 끊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입구 근처에 떨어져 있었던 영중의 휴대전화였다. 방금 막 전화가 끊겨 액정화면은 켜진 채였다. 부재중 전화 1건 - 준수, 새로운 카카오톡 메시지 1건. 두 줄의 팝업 알림을 알아본 준수가 시선을 앞으로 돌리면, 벽에 죽 늘어선 락커에 기댄 채 쓰러진 영중이 거기 있다. 체육관으로 돌아오는 동안 쌓였던 약간의 짜증, 그리고 다소간의 불안감을 모두 휘발시키는 광경이다.
영중의 원중고 농구부 셔츠 허리께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붉은색과 검은색 원단으로 만들어진 셔츠를 더럽힌 붉은 액체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아서, 녀석이 기댄 락커 표면과 바닥에 미끄러지듯이 튄 새빨간 피가 아니었다면 준수는 영중의 상태를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전영중은, 그러니까, 영문을 모르겠지만, 피를 이만큼이나 흘릴 정도로 존나 심하게 다쳤다. 당장의 상황만을 간신히 파악해서 결론을 도출해내는 동안 준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린다.
“야, 야. 정신 차려.”
겨우 되찾은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린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몇 번을 불러 봐도 영중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준수는 더욱 조급해진다. 이, 이 새끼 설마……. 중얼거리며 영중의 곁에 쪼그려 앉아 녀석의 어깨를 마구 흔든다. 가슴께에서 뜨거운 피가 튄다. 그제야 준수는 영중의 옆구리를 관통한 상처를 발견한다. 전영중은, 아마도 누군가에게 칼빵을 맞아서, 존나 심하게 다쳤다. 누가 봐도 자명한 결론을 갱신하고 나니 영중이 천천히 눈을 뜬다.
“…응? 준수.”
“전, 전영중 너…….”
다쳤잖아. 목소리가 자꾸만 떨려 와서 준수는 그냥 입을 다물어버린다. 대신 짧게나마 설명을 요구하는 눈을 하고 영중과 시선을 얽는다. 그에 반응하듯이, 꿈결처럼 풀어져 있었던 동공이 조금씩 또렷해진다. 그리고 곧, 서서히, 영중의 두 눈에 온갖 감정이 난잡하게 섞여든다. 준수는 비 갠 뒤의 물웅덩이를 실수로 밟아버렸을 때를 떠올린다. 가라앉아 있었던 흙먼지가 일어나면서 불결하게, 불쾌하게, 찝찝하게 일렁이며 탁해지던 흙탕물을…….
“우와, 야……. 헛것이 아니네? 진짜로 왔네, 준수…….”
씨발…….
머리가, 애초에 뜨거워졌던 적도 없지만, 영중의 비웃음에 가까운 실소를 듣자 얼음처럼 차갑게 식는다. 진이 빠져서 시선을 떨궈버린 준수는 아랫입술을 짓씹는다. 전영중 이 새끼는 대체 뭐가 하고 싶은 거지? 나한테 경기 하나 졌다고 이런 또라이 같은 자작극을 벌일 만큼 정신이 이상했나?
“아, 으윽.”
웃다 말고 진심으로 고통을 느끼는 얼굴을 하고는 신음을 흘리는 영중을 본 준수는, 조금 전의 가설을 철회한다. 전영중은 자신을 상대로 다소 오바를 떠는 감이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구제 불능으로 미친 새끼는 아니다. 더구나 전영중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체육인이니, 자신의 몸에 해가 되는 짓을 자진해서 계획했을 리는 없다. 이건 분명 무언가의 사고다. 준수가 머리를 굴리며 한참을 말이 없자, 자신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지작거리던 영중이 먼저 입을 연다.
“네 지갑 여기 없어.”
“…알아.”
“애초에 난 본 적도 없어. 그냥 구라 친 거야.”
“어, 그래. 다 알아.”
영중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간다. 준수는 종종 영중의 심리가 대체 무슨 기준으로 변화하는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고, 지금 같은 때가 딱 그랬다.
“준수야……, 그럼 진짜 왜 온 거야? 버스 타고 집 가려던 거 아니었어?”
“아니, 너는, 씹……. 부르니까 와 줘도 지랄이야.”
전영중, 옆구리에 칼빵을 맞고도 입 하나는 가증스럽게 잘만 놀리는 새끼. 그 지점에서 기묘하게도 현실감각을 일부 되찾은 준수는 휴대전화를 꺼내 119에 전화를 건다. …네, 네. 여기 ○○체육관인데요. 사람이 칼에 찔렸어요. …아아, 네, 네. 해볼게요. 네, 빨리 와 주세요. 준수가 침착하게 몇 마디 짧은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중은, 준수의 손이 예고 없이 제 셔츠를 잡아 올리자 눈에 띄게 동요한다.
“…너 진심이야, 준수야?”
“지혈 안 할 거야? 할 수 있으면 해 놓으래.”
아아. 영중은 김빠진 한숨을 쉬고 락커에 다시 등을 기댄다. 피 묻은 락커 손잡이를 망설임 없이 잡아당겨 연 준수는 락커 안에서 지혈에 쓸 만한 물건을 찾는다. 몇 번 헤집다 보니, 땀 냄새가 나는 유니폼 몇 벌 사이에서 탄력 붕대가 손에 집힌다. 준수는 붕대를 꺼내어 적당한 길이로 끊어낸다.
“그거 제대로 할 줄은 알아?”
“몰라. 그냥 좀 힘줘서 두르면 되는 거 아니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 조금 무서워지는데…….”
“그래도 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아, 준수 너 설마 내가 죽을까 봐 겁이라도 났……, 아, 아파!”
너는 진짜……. 준수는 진심으로 분노를 담은 눈으로 영중을 흘기며 상처 부위에 붕대를 감던 손에 부러 힘을 주어 짧게 누른다. 이제는 다소 싫은 녀석이 되어 버린 건 맞지만, 우리가, 뭐, 원수 사이도 아니고.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자식이 옆구리에 칼을 맞았고 쓰러져 있으니 덜컥 겁부터 나는 것은, 오래도록 녀석의 친구였던 준수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쯤에서 준수는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는다. 옆구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녀석을 앞에 두고 이 이상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영중의 고통 어린 비명을 듣는 것은 생각보다 유쾌하지 않았다.
“누가 이래 놨냐?”
“빨리도 물어보네.”
아니, 별로 좋은 화제가 아니었나. 이 새끼는 당장이라도 혼수상태에 빠질 것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는 제 성질은 박박 잘도 긁는다. 준수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애써 눌러 담으며 영중이 입을 열기를 기다린다.
“준수야, 너 팬 관리 좀 잘 해.”
“뭐, 팬? 갑자기, 뭔 헛소리야. 프로선수도 아니고……,”
영중의 뜬금없는 소리에 참아둔 화를 터뜨리려던 준수는 문득 조용해진다. 영중에게 그런 짓을 할 법한 사람은 자신으로서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로 타겟을 돌린다면, 짚이는 데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아…….”
몇 주 전부터 락커에 편지를 넣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학교 농구장의 락커뿐만이 아니라, 원정 경기를 갈 때도 준수의 락커 자리에는 언제나 작은 편지가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러브레터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편지 내용은 점점 과격해졌다. 당신 옆에는 저만 있어야 해요, 그런 의미의 문장들이 잔뜩 적힌 종이가 전체 내용의 절반을 넘어갈 때쯤부터 준수는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준수에게는 애초에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이들은 대개 과감하지 못해서, 편지 같은 간접적인 수단으로나 내면을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준수야, 이제 좀 알겠어?”
…누군가가 부추기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네가 칼 맞을지도 모르는 거 내가 대신 맞아 준 거야.”
“누가, 아니, 야……, 누가 맞아 달랬냐? 와, 진짜 웃기는 새끼…….”
진짜 너랑 엮이기 싫다……. 뭐라고, 준수야? 지금 나 찌르고 튄 게 뭐, 내 스토커인 줄 알아? 내가 너랑 엮이기 싫어야 정상 아니야?
자신이 그런 쪽으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점도 있었지만, 여하튼 영중이 한발 먼저 그것을 알아채고 자신은 모르는 어떠한 행동(준수는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영중에게 굳이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을 취했다는 점이, 뭐라 형용할 수 없이 오싹했다.
“나한테 전화는 왜 했는데?”
“119.”
“1……, 뭐?”
“나 곧 좆될 것 같으니까 와 달라고.”
그렇다고 진짜 올 줄은 몰랐네. 정말로 네 지갑이라도 훔치고 전화할 걸 그랬나 하고 지독하게 후회했는데 허망하다……. 웅얼거리던 영중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쪼그려 앉은 채 두 팔로 제 다리를 끌어안고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던 준수의 시선이 다시 영중에게로 향한다. 녀석의 눈꺼풀이 자꾸만 감겼다. 급히 팔을 풀어낸 준수는 양손으로 영중의 뺨을 가볍게 두드린다.
“…야, 전영중. 정신 놓지 마.”
“어지러워.”
“구급차 올 때까지 눈 뜨고 있어.”
“그냥 나 죽을 것 같으면 네가, 그, 심폐소생술 해 주면 안 돼?”
가슴 압박이랑, 인공호흡이랑, 그런 거……. 잠꼬대처럼 늘어놓는 단어들은 어딘가 풋내기 사춘기 소년처럼 들리기마저 한다.
준수는 눈살을 찌푸리고 한참을 대답이 없다. 영중이 제 상처를 지혈한 붕대를 갈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쯤, 준수의 목소리가 귓바퀴에 내리꽂힌다.
“너 나 오늘 하루 보고 더이상 안 볼 생각이냐?”
옆구리에 칼을 맞았고, 출혈의 양도 적지 않다. 이것은 아마 영중의 19년짜리 인생에서 가장 큰 부상일 것이다. 하지만 작은 체구의 여성이 휘두른 칼은 급소를 맞추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영중의 상처는 생명에 지장을 주는 수준은 아니었다. 선수 생활에 장기적으로 문제가 생길 정도의 중상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이건 다 꾀병이다. 상처 입은 부분이 더럽게 아프고, 어지러운 건 사실이었지만. 준수는 이 사실을 자신의 몸을 더듬어 가며 붕대를 감아 주면서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벌써 내일부터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구나. 미처 꺼내지 못한 말을 목구멍 안쪽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은 영중은 푸핫, 하하하, 하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다.
“니가 진짜 존나 싫다, 준수야…….”
“어, 나도.”
멀리서부터 앰뷸런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문득 귀를 찔러 오는 소음이 그렇게도 듣기가 싫어서, 영중은 제 앞에 쪼그려 앉은 준수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는다. 준수도 영중을 밀쳐내지 않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좁혀진 간극 속에서, 역한 피 냄새가 나는 불온한 정체가 이어진다. 앰뷸런스에서 내린 구조대원들이 뛰어와서 영중을 부축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