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웬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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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러, 필러 (filler, peeler)
사유
·
2026-02-06 20:58
속을 채우고 있는 것, 겉을 벗겨내는 것

투고일: 22.10.14


“오웬.”

 

이름이 불리자, 침대에 걸터앉은 채 초조하게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오웬은 어깨를 들썩인다. 소중한 물건을 망가뜨려 버린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기사님은, 어디에 있어? 괜찮은 거야? 내가……,”

“진정하고 들어.”

 

팔짱을 끼고 선 시노의 뒤로, 한 손에 머그잔을 든 히스클리프가 걸어 들어온다. 방금 막 데워서 뜨거워, 조심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오는 우유 한 잔을 오웬에게 건넨 히스클리프는 당부의 말을 전하며 부드럽게 이야기한다.

 

“카인은 의사 선생님에게 갔으니까 괜찮아. 그 정도는 흉터도 안 남게 고쳐주실 거야.”

“다행이다…….”

 

카인은 괜찮다. 애타게 바랐던 소식을 전해 들은 오웬은 창백한 낯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손에 든 우유를 마시지도 못하고, 여전히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녀석의 모습은 무척이나 처량하다. 그런 오웬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시노는 악의 없는, 그러나 다소 단도직입적인 어조로 추궁한다.

 

“왜 그랬어?”

“시노, 그렇게 쏘아붙이면 무서워하잖아.”

 

아니나 다를까 오웬은 어깨를 들썩이며 시선을 피한다. 시노를 막아 세운 히스클리프가 헛기침을 한다. 본디 이런 부류의 대화는 자신의 쪽이 더 익숙하다. 천천히, 안심시키듯이, 그럼에도 가식적이지는 않게. 히스클리프는 눈앞의 천진한 마법사가 겁을 먹지 않도록 말을 건다.

 

“탓하는 건 아니야, 오웬.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듣고 싶어.”

 

삼십 분쯤 전, 오후 수업을 끝마친 시노와 히스클리프는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노는 유독 질문거리가 많았고, 히스클리프는 실수가 잦아 수업은 평소보다 오래 늘어졌었다. 봐, 시노, 벌써 달이 떴어. 히스클리프가 2층 복도 끝의 창문 너머를 손으로 가리킬 때쯤 카인의 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두 사람이 서둘러 문을 열자, 잠옷 바람으로 선 오웬의 어깨너머로 한 손으로 얼굴을 움켜쥔 채 주저앉은 카인이 보였다. 살가죽이 반쯤 뜯어져 나간 자리에 새빨간 얼굴 근육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피에 젖은 손을 움찔거리며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카인과, 그 앞에 선 오웬. 히스클리프는 카인에게로 뛰어가 그를 부축했고, 시노는 오웬에게 다가갔다. 사건의 근원은 불 보듯이 뻔했다. 곧바로 오웬을 질책하려던 시노는 문득 말문이 막혀서 물러섰다.

오웬은 떨고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억눌린 숨을 내쉬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시노의 시선을 피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이질적인 광경. 오웬이 그러한 표정을 짓는 것을, 시노는 전에 한 번 본 기억이 있었다.

 

“…궁금했어.”

“응?”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귀를 파고든다. 오웬은 머그잔을 양손으로 쥐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뒤쪽으로 기울인다. 벽에 장식된 칼, 녹슨 갑옷, 정리가 덜 된 장갑이나 양말 같은 것들을 빤히 쳐다보던 오웬의 입술이 달싹인다.

 

“기사님은 내 앞에서는 조금 다르게 웃는 것 같아.”

 

히스클리프는 난처한 눈으로 오웬의 눈치를 살핀다. 카인의 옆에서 우연히 목격한 것이나, 전해 들은 것으로 그들의 사정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녀석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얼추 알 것도 같았다.

카인은 오웬을 줄곧 경계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적이 있는 상처 쪽의 오웬 상대라면, 어쩌면 더욱 강하게.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 중앙의 전 기사단장은 감정을 잘 감추지 못했다. 선의를 표방하는 미소 뒤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경계심을 눈치챈 것일까.

 

“더 알고 싶었어. 그렇게 생각했더니, 기사님의 얼굴이 그대로 뜯어져 나가서……,”

 

억눌린 단어들이 죄수의 고해성사처럼 꾸역꾸역 터져 나와 문장을 이룬다. 숨이 차고, 열을 띤 음성이다. 오웬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위태롭게 반짝거리던 눈을, 별안간, 질끈 감는다. 부끄러운 고백은 거기서 뚝 멈추고 만다.

잠시간의 정적 속에서 녀석의 새하얀 정수리를 바라보던 시노는 한 걸음 전진한다. 찰나, 오웬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바뀐 것을 눈치챈 히스클리프가 시노의 어깨를 붙잡지만, 한발 늦은 뒤다.

 

“어이, 좀 더 자세히……,”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인지 당장 설명해.”

 

표독스러운 목소리. 곧바로 몸을 뒤로 뺀 순간 쨍그랑,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내팽개쳐진 머그잔이 산산조각난다. 허여멀건 우유가 엎질러져 바닥을 적시고 침대 밑으로 흘러 들어간다. 야, 내 신발이……. 시비조로 말을 걸어도 주춤하는 기색 하나 없자 시노는 그대로 입을 다문다. 아무래도, 상처의 심술은 변덕스럽게도 여기에서 끝인 모양이다.

고개를 들고 시노를 마주 보는 눈에 새겨진 것은 노골적인 적의다. 비협조적이고 위험하지만, 좀 더 익숙한 쪽의 녀석이 돌아왔다. 오웬은 흘기던 눈을 좁히며 다그친다.

 

“멍청하게 나랑 눈 마주치지 마. 설명 안 하면 죽일 거야.”


“아, 아야야.”

“무리해서 크게 웃으면 안 된대도.”

 

벗겨진 살가죽은 마법으로 붙여 놓았지만, 타격을 입은 얼굴 근육이 진정하려면 시간이 걸려. 피가로는 습관처럼 활짝 웃어 보이려다 고개를 떨구는 카인을 타이른다. 작게 앓는 소리를 낸 카인은 제 뺨을 만지작거린다. 골격을 따라 종이가 찢어지듯 엉망이 되었던 낯은 거짓말처럼 처음 모습 그대로 감쪽같이 깨끗해져 있다. 그 얼굴에 자리 잡은, 어딘가 경직된 미소를 지켜보던 피가로는 문득 웃음을 터뜨린다.

 

“어른스러운 미소는 아직 서투른가?”

“의식하니까 잘 안 되네.”

 

카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피가로가 내민 찻잔을 받아든다. 찻잔 속을 들여다보면, 약간은 지친 기색을 하고 있는 제 얼굴이 선명하게 비친다. 오른쪽 눈 밑부터 시작해서, 뺨을 따라 비스듬히 벗겨져 내려갔겠지. 느껴졌던 고통으로부터 당시 자신의 모습을 추측해본다. 제 피부를 도려내던 오웬을 상기한다. 녀석은 동요했다. 일 절의 접촉은 없었지만, 그건 분명 어린 쪽의 녀석이었다.

 

“피가로, 궁금한 게 있어.”

 

어수선해진 책상을 정리하던 피가로가 뒤돌아본다. 카인은 머리를 긁적인다. 어떻게 물어봐야 좋을까. 짧게 고민하고는 간단히 묻는다.

 

“강한 마법사의 몸에, 어리고 철없는 영혼이 들어가면 어떻게 되지?”

“하하, 어려운 질문이네.”

 

피가로는 생각하는 듯이 허공을 응시한다. 이론적인 가능성을 고민해보는 것 같기도, 오랜 기억 속에서 예시를 되짚어보는 것 같기도 한 눈이다.

 

“경우마다 다르겠지만 말이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강력한 마법을 써 버리게 될지도 모르지?”

 

잠시 멈춰 있었던 피가로의 손이 다시 책상을 정돈하기 시작한다.

 

“특히 감정이 격해지거나, 무언가를 강하게 소망할 때 말이야.”

 

피가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조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린다. 피가로는 태연하게 서랍을 정리하고, 카인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방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것은 이번 사건의 발단, 오웬이다.

 

“…아아, 뭐야. 멀쩡하네.”

 

동쪽의 꼬맹이 자식들, 허풍 떨고 앉았어. 투덜거리며 두 사람을 저주한 오웬은 카인에게 성큼 다가간다. 어깨를 눌러 의자에 도로 앉히고, 고개를 숙인다. 가까이, 좀 더 가까이. 조금 산발이 된 카인의 머리카락이 제 이마를 간지럽힐 때쯤 멈춘다. 흉터 하나 없는 기사의 얼굴을, 이 자리에서 곧장 해부해버릴 듯이 사납게 훑어보고는 눈살을 찌푸린다.

 

“기왕이면 좀 더 만신창이로 뜯겨나가 있었으면 했어.”

 

쥐어 짜낸 듯한 문장. 카인을 밀어낸 오웬은 간사한 웃음을 머금고 시선을 돌린다. 이런 패턴은 익숙하다. 멋대로 나타나서는, 알 수 없는 험담만 하고, 이제는 또 멋대로 사라질 시간인가. 어렴풋이 직감한 카인은 의자에서 일어난다.

 

“오웬, 아직 가지 말아 봐. 물어볼 게……,”

“몰라, 대답 안 해. 섬뜩한 의사 선생님이랑 병원 놀이나 마저 하고 있어.”

 

잠깐, 의사 선생님은 하나도 안 섬뜩한데 말이지. 능청스레 대꾸하는 피가로를 뒤로하고, 오웬은 그대로 돌아서서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린다. 책상 정리를 끝낸 피가로와, 한 손에 찻잔을 들고 멍하니 앉은 카인만이 방에 남는다.

 

“그새 차가 다 식었네. 데워 줄까?”

“괜찮아, 내가 나가서 데울게.”

 

카인은 차가워진 찻잔을 한번 힐끔 보고는 빈 손으로 먼지를 털며 일어선다. 오웬이 굳게 닫아 놓은 문을 열어젖히고, 방을 서둘러 나서는 걸음걸이.

익숙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