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일: 21.6.12
연금술사! 문 열어, 연금술사!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낡은 문을 부서져라 두드린다. 녀석, 또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는 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중, 문득 흉부에 통증이 느껴지자 빈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다. 곧 사레라도 들린 듯이 길고 고통스러운 기침소리가 이어진다. 콜록, 콜록, 큭, 쿨럭……, 주저앉아 검붉은 피를 바닥에 흩뿌릴 때쯤이 되어서야 문이 열린다.
왕자님!
다급하게 뛰어나온 또래의 남자가 그를 부축해 안으로 들인다. 고급스럽게 윤이 나는 실크 셔츠가 빗물과 피로 흠뻑 젖어 엉망이다. 발작하듯 작게 움찔거리는 몸을 끌어안고 천천히 쓰다듬어 주면, 곧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남자의 어깨에 목을 기대어 온다. 사람이란 제아무리 한 나라의 왕자라도 병이 들면 이리도 약해지는구나. 생각한 남자는 입을 연다.
왕자님, 또 이런 늦은 시간에 침소에서 몰래 빠져나오신 건가요? 이렇게 비가 오는데.
하아, 하……. 됐어, 신경쓰지 마. 그 자식들, 약에 뭔가 탄 게 분명해.
섣부르게 판단하는 건 경솔하지요. 설마 왕실 의사들이 그런 반역적인 행동을…….
하지만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심해지잖아.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떨리는 손을 들어 입가를 닦은 왕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차라리 네가 내 전담의였다면 좋았을 텐데.
왕자는 즉위식을 몇 주 앞두고 병에 걸려 앓아누웠다. 가벼운 기침으로 시작된 병세는 곧 발열과 두통, 그리고 흉통을 동반하게 되었다. 각혈이 시작되고부터 왕자의 몸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원인조차 짐작할 수 없는 미지의 병이었기에, 왕자는 홀로 침상에서 무기력하게 마른 기침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남자는 왕자의 셔츠에 묻은 피를 검지로 한 번 훑는다. 끈적거리고,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나며, 이제는 거의 검은색에 가깝다. ……인간의 피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왕위에 오르기만 해 봐라. 전부 목을 매달아서 왕궁 입구에 걸어버릴 거야.
잠깐 말씀을 멈추시고 숨을 천천히 쉬세요. ……응, 천천히. 그리고 저를 보세요.
왕자가 자신을 연금술사라 칭하는 남자를 알게 된 것은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왕자는 각본집을 읽으며 왕궁 주변을 산책하는 것을 즐겼고, 그날 유난히 외진 숲길 속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남자의 집을 발견했던 것이다.
평생을 틀에 박힌 후계자의 길만 걸어 온 왕자에게 남자의 집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였다. 왕궁 서재에도 없는 온갖 전문 서적과 오래된 각본들로 빼곡한 책장, 본 적도 없는 신기한 실험기구들, 그리고 예의바르고 재치있는 언변을 가진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특히나 연극 얘기가 나오면 양쪽 다 신이 나서 이것저것 떠들어 대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곤 했다. 왕자는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창문을 열고 왕궁을 빠져나왔다. 밀회는 매주 이어졌고, 왕자는 곧 병을 얻었다.
아직도 아프세요?
숨을, 윽……, 쉴 때마다. 심장이, 칼에 찔린 것처럼 아파…….
옷을 조금 들춰보시겠어요.
왕자의 핏기 없는 손이 선뜻 제 셔츠를 잡아올리면, 남자는 왕자의 나신을 꿰뚫을 듯 응시한다. 체격이 잡혀 있던 몸은 몇 주간의 투병으로 눈에 띄게 야위었다. 혈색 좋던 피부는 붉은 빛을 쥐어짜버린 듯이 창백하다. 거기에 심장을 중심으로 검은 핏줄이 불거져 도드라진 모습은 도무지 비단길만 걸어 온, 한 나라의 후계자가 가진 몸이라고 믿기 어려운 광경이다. 남자는 손을 뻗어 왕자의 가슴팍을 쓸어 본다. 미열이 있는 왕자의 살갗은 부드럽고, 비에 젖어 축축하고, 또 상상 이상으로 뜨겁다.
점점 과감해지던 손가락 끝이 가슴팍 단단한 곳에 닿자 아, 야릇한 탄성이 새어나온다. 남자는 숨을 멈추고 왕자를 바라본다. 몽롱한 눈이 나른하게, 하지만 집요하게 시선을 맞춰 오고 있었다.
……하고 싶어, 루이?
……네?
꿈결처럼 속삭이던 왕자는 곧 움찔 떨더니, 졸음을 쫓으려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젓는다. 자신도 무슨 말을 뱉은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다. 창백하던 왕자의 얼굴이 한순간 붉어진다.
아, 아니, 그게, 방금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해 줘. 와, 왕자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열이 있어서 그런지 머리가, 어질어질하군……. 마치, 내 것이……, 아닌 듯이…….
……후후, 그러죠. 걱정하실 것 없어요.
그보다 약, 지어 뒀지? 빨리 돌아가서 자야 해……. 다음 주에 즉위식이 있으니까.
왕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잔기침을 시작한다. 콜록, 콜록. 작게 소리를 낼 때마다 울컥울컥 토하고 마는 끈적한 피를 소매로 닦아내며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즉위식, 이라는 단어를 들은 남자는 의아한 눈을 하고 왕자를 바라본다.
어라,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관심 좀 가져, 나랏일이잖아.
그야 저는 바깥과는 교류를 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니까요.
싱긋 웃음짓고는 왕자를 재차 부축해 거실 소파에 앉힌 남자는 서둘러 제 책상을 정리한다. 『고대 ××약학도감』, 『××를 부르는 법』, 『××의 ×××』……. 들켜서는 곤란한 금서 몇 권을 책장 깊숙한 구석에 꽂아넣으며 입을 연다.
제가 지어드리는 약은 좀 어떠세요? 몸에는 잘 맞으세요?
아, 나쁘지 않아. 적당히 달아서 삼키기 쉬워. 그 자식들이 처방한 약은 얼마나 쓴지, 생각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
원래 쓴 것이 몸에 좋고, 단 것이 몸에 좋지 않은 법이랍니다. 직언을 삼킨 남자는 서랍 속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시약병을 꺼낸다. 불길하게 담겨 있는 그것은 점도가 높아 끈적하고 새까만 빛을 띠는 게, 왕자가 토해낸 피를 똑 닮았다.
거사를 앞두고 계시니, 양을 늘려드릴게요.
그래.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이 은혜는 꼭 갚겠어, 연금술사.
후후, 별 말씀을. 남은 며칠이 특히 괴로울 수도 있겠지만 조금 참아주셔야 해요. 즉위식을 거행하는 날이 되면 머릿속이 아주……, 상쾌해질 테니까요.
좋아, 그날이 기대되는군. 하하!
아픔을 참아내며 호쾌하게 웃어 보이는 왕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의 입가에도 슬그머니 웃음이 번진다. 즉위식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즉위식 자리를 빌어 모두에게 이 아름답고도 놀라운 쇼의 서막을 보여줄 수 있다니, 그 얼마나 영광이겠는가.
저도 왕관을 물려받은 왕자님의 모습이 기대되네요…….
이윽고 남자는 시약병을 열어 검은 액체를 유리잔에 몇 방울 떨어뜨린다. 물이 가득 든 유리잔을 조금 흔들어 주면, 잉크가 퍼지듯 액체는 순식간에 물 속에 섞여 들어간다. 남자는 거울 앞에 서서 흠뻑 젖어 엉망이 된 앞머리를 정리하던 왕자에게 유리잔을 내민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예의바르게 말을 건넨다.
……약 드실 시간입니다, 왕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