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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7 18:32
80%, 100%, 150%,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뒤에도…….

투고일 21.10.31




“……할로윈 특별 공연 기획?”


수업이 끝난 오후, 교과서를 사물함 속에 차곡차곡 꽂아 넣던 츠카사는 고개를 들어 루이가 내민 수첩을 힐끔거렸다. Halloween이라고 휘갈겨 놓은 글씨 아래에 보라색 볼펜으로 그린 잭오랜턴, 유령, 해골 모양의 낙서가 눈에 띄었다.


“벌써 10월이야, 츠카사 군. 할로윈은 우리에게 나름 특별한 날이잖아?”

“아아, 그래. 작년에는 원더랜즈×쇼타임 명의로 처음 대회를 나가서 3등을 했었지.”


종례를 마치고 청소까지 모두 끝난 교실에는 루이와 자신, 단 둘뿐이었다. 츠카사는 사물함 문을 닫고 일어섰다. 드물게도 날씨 좋은 저녁이었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가을바람이 살살 불고 있었다.


“이젠 등수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작년의 쇼도 충분히 좋았어. 후후, 특히 츠카사 군이 좀비 로봇을 피해서 벽을 오르는 장면이 최고였지.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올해에는 또 색다른 전개의 할로윈 기념 공연을 해 보면 어떨까 싶어.”


벽에 걸린 달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오늘 막 앞장을 뜯어낸 10월 달력에는 빨갛게 물든 단풍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츠카사는 그림 아래에 나열된 숫자들을 응시하며 미리 잡아 놓은 일정과 선약을 짚어 보았다.


“……아주 좋은데! 마침 그 무렵은 우리도 아직 특별히 할 일이 없을 시기고. 그래서, 어떤 이야기로 할지 생각은 좀 해 봤어?”

“아직까지는 딱히? 각본을 쓰는 건 츠카사 군, 너니까. 자세한 건 같이 얘기해보고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뭐, 그래. 여긴 이제 잠가야 하니까 자리를 좀 옮기자.”

 

 

 

근처의 도서관에 자리를 잡은 둘은 십여 분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수첩 종이 두 장이 어수선한 메모와 낙서로 뒤덮이는 동안, 공교롭게도 각본의 구성에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츠카사가 고심 끝에 제안하면 루이는 어깨를 으쓱였고, 루이가 터무니없는 계획을 늘어놓으면 츠카사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둘 모두에게 와닿는 참신한 발상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날인가 봐. 시간이야 아직 많으니까, 저녁 식사나 하러 갈래? 장난스레 푸념하며 수첩을 접어 주머니 속에 찔러넣고 일어서려던 루이의 어깨를 잡은 츠카사는 마지막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아니면 아예 이런 건 어때?”


자신의 자리 바로 옆에 놓인 책수레를 뒤적이던 츠카사는 곧 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기시 유스케의 『악의 교전』.


“안티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세우는 거야. 악당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는 거지. 색다른 할로윈 쇼를 원한다면 이런 것도 괜찮지 않아?”


안티 히어로라……, 츠카사의 말을 천천히 곱씹던 루이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좋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경우에는 좋은 인상을 남기는 주인공이어서는 안 돼. 소위 범죄 미화라고도 하잖아? 너도 잘 알다시피 이 쇼는 남녀노소가 보러 올 테니까 더더욱.”

“그렇지.”

“나쁘다, 라는 인상을 확실히 심어줄 수 있는 인물상이어야 해. 그러면서도 네가 원하는 대로 눈에 띄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명의 주인공. 스무 살 남자. 절도, 폭력, 방화와 살인을 즐기는 무법자. 주인공은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다 어느 할로윈 날 밤, 자신에게 살해당해 귀신이 된 자들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맞게 된다.

정이나 연민을 불러일으킬 만한 안타까운 사연 따위는 작중에서 일절 묘사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저 반면교사의 대상이 되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짜인 절대악에 불과했고, 화려한 악행을 보여주는 초반부터 끔찍하게 고통받으며 죽게 되는 후반부까지 그 어떤 다른 역할보다도 눈에 띄었다. ……즉, 설계는 완벽했다.

루이의 연출은, 언제나 그랬듯이, 교묘하고도 철저했다. 대부분의 장면은 연령가에 맞추어 각색을 거쳐서 익살스럽게 연출되었지만, 악인을 연기한다는 낯선 무게감은 여전히 주연배우의 온몸을 동여매고 늘어졌다.

그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혹은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 일종의 면죄부처럼 다가와서였을까. 츠카사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주인공에게, 묘하게도 지금까지 느낀 적 없는 최고의 몰입감을 느꼈다. 물렁물렁한 장난감 칼과 전구로 빛을 발하는 가짜 횃불을 들고도 자신의 역할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 이틀, 사흘……, 연습을 거듭할수록 연기는 정교해졌다. 츠카사 요새 물오르지 않았어? 네네의 말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주고는 꾸깃꾸깃해진 각본을 펼쳐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폭력적인 움직임으로 무대 위를 누비고, 극악무도한 문장들을 거리낌 없이 늘어놓고, 독기 서린 웃음을 웃어젖혔다. 츠카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캐릭터를 연기해내는 배우로서 꽤나 마음에 들었다.

 

 

 

연극 준비는 순조로웠다. 마지막 리허설은 대성공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덜덜 꺄아악- 하는 기분까지 들었지, 에무가 극찬을 하며 과장된 리액션을 보여줄 때 츠카사는 조용히 웃었다. 이제 스테이지에 올라서서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곧 주인공의 대사였고, 인물 그 자체였다.

 

불을 질러. 태워 버려. 가차 없이 짓밟아. 갈기갈기 찢어. 전부 엉망으로 만들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뜨려!

점잖은 척하던 두 손이 질척질척, 끈적끈적, 후끈후끈해질 때까지!

……이런 대사가 각본에 있었나?

아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힘을 실은 몸짓. 악에 받친 목소리. 땀에 젖은 몸을 스치는 서늘한 저녁 공기. 쇠 긁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연출 장치. 숨죽인 채 눈을 반짝이는 관객들. 이윽고 쾅, 하고 스테이지를 울리는 굉음. 윤활유 냄새. 은은한 붉은 빛으로 빛나는 스테이지 조명. 박수갈채와 환호성.

빠르게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 씬 넘버는 악을 심판한 스테이지의 피날레를 뛰어넘어 빠르게 흐른다. 석양이 지는 스테이지에서 광장으로, 붐비는 광장에서 골목길로, 어둑어둑한 골목길에서 놀이터로, 버스 정류장으로, 공중화장실로……. 단편적인 장면들이 회전목마처럼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며 전환된다. 둔하게 머리를 감싸오는 어지럼증이 사고를 방해한다. 그 대신 수도 없이 소리쳐가며 외운 대사들이 목구멍 속에 뿌리를 내리고 메아리친다.

 

그냥 다 없애 버려!

 

양손에 잔뜩 힘을 준다.

 

죽여 버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죽여!

 

잡히는 대로 밀어붙여 망가뜨린다.

 

죽여!

 

땀 같은 것으로 축축해진 손을 펼친다.

 

죽여!

 

깜깜한 길을 비틀비틀 걸어 나가던 발걸음이 늘씬한 그림자에 가로막힌다.

 

― 이 시간에 날 찾아오다니 별일이네, 츠카사 군.

― 세상에, 그게 무슨 꼴이야.

― 츠카사 군……?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죽……!”


목소리를 의식한 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두 눈이 떠진다.


“어지간히 피곤했나 봐? 잠꼬대를 다 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마비되어 있었던 오감을 서서히 일깨운다. 방금까지 고장 난 TV 화면처럼 무질서하게 쏟아지던 단편적인 장면들이 하나둘씩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루이? 여기는……,”


츠카사는 잔뜩 힘이 들어간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천장에 매달린 형형색색의 풍선, 딱딱한 소파,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기계장치 부품들, 젖은 먼지 냄새.

……우리 집이 아니다.

여긴 루이의 방이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번뜩,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급습한다. 츠카사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제 두 손을 확인한다.

……아무 흔적도 없이 깨끗하다.

츠카사는 손을 몇 번 쥐락펴락 해 본 뒤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전원은 켜져 있다. 20××년 11월 1일 월요일, 오전 5시 13분, 배터리 잔량 4퍼센트. 배터리 경고 메시지를 지우면 알림창에는 문자 몇 통이 쌓여 있다.


오늘 공연 고생했어!

컨디션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얼른 집에 가서 쉬어 ‧º·(˚ ˃̣̣̥⌓˂̣̣̥ )‧º·˚

내일 원더 스테이지에서 다시 만나자! 원더호이!

 

― 오오토리 에무, 10/31 06:45 PM

오빠, 카미시로 씨에게 연락받았어!

오늘 그쪽에서 자고 온다며?

마지막 하나 남은 포테이토 칩은 내 차지지롱, 훗훗후♪

할로윈 쇼 얘기는 내일 학교 다녀와서 꼭 해주기야!

 

― 사키, 10/31 09:14 PM

[ ○○카드 10월 명세서 ]

… 더보기

 

― ○○은행, 11/01 12:04 AM

★☆★☆ 37스테이지 클리어! # ◇◇버스터즈

어때요, 굉장하죠? 상위 0.9%의 멋진 기록이에요!

 

― 쿠사나기 네네, 11/01 04:32 AM

공유 버튼 잘못 눌렀어

그냥 무시해

 

― 쿠사나기 네네, 11/01 04:35 AM


더없이 일상적인 이야기에 불과한 메시지를 전부 확인한 츠카사의 입술 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보이거나.

휴대전화를 움켜쥔 손은 어느새 포털 사이트를 열어 사건사고 뉴스를 확인하고 있었다.


10~20대 남성 세 명, 괴한에게 무차별 폭행당해 입원… ― 3시간 전

상가 노래방에 불… 4명 사망 7명 부상 “고의 방화 가능성 있어” ― 5시간 전

□□□현 일대의 보석상 여러 곳에 강도 습격… “경찰 조사 중” ― 6시간 전


인근 지역을 둘러싼 온갖 비보들이 뉴스 피드를 가득 채운다. 끝도 없이 스크롤을 내리는 동안 츠카사의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간다. 이건 정황상 나일 리 없다. 이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건, 나라면 가능했을지도. 이건……, 어쩌면 정말 내가 저질렀을지도.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도중에 액정 불빛이 예고 없이 꺼진다.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다.


“좀 더 자, 츠카사 군. 등교하기까진 세 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니까.”


책상 앞에 앉아서 연출 장치를 조립하는 루이의 목소리는 태평하기 짝이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모호한 기억 속에 책갈피처럼 끼어 있었던 루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아직도 두 귀에 선명하다. 그마저 꿈일지도 모르지만, 어째서인지 츠카사에게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루이는 지금의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한참을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루이는 조립을 멈추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 혹시 휴대전화가 꺼진 거야? 충전해줄까?”


폭행, 방화, 절도……. 대본 속에서 보았을 때는 현실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글자들이다. 츠카사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쓴다. 초조하게 침을 삼키고 들썩이는 어깨를 의식한다.

……틀렸어, 가라앉힐 수 없어. 불안감과 불확실한 죄악감, 그리고 기묘한 흥분감이 한데 뒤섞여 심장을 압도한다. 머리가 저릿거리며 둔해져 간다. 수뇌부가 고장 나자 사령관을 잃은 육체는 심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자리에서 일어나 저에게로 다가오는 루이의 옷깃을 움켜쥐고 책장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순식간이다.

쾅, 덜커덩. 책장이 통째로 흔들리더니 금속 덩어리가 땅바닥을 뒹구는 소음이 귀를 찌른다.


“아차, 내 스패너.”


확실히, 루이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일으킬 리 없는 비정상적인 소란에도 필요 이상으로 태연하다. 오히려 책장에 등을 부딛힌 채로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차분하게 말을 이을 뿐이다. 그 의연한 태도에 츠카사는 자신의 추측을 확신으로 결정짓는다.


“난데없이 멱살이라니, 조금 당황스럽네. 놔 줄래?”

“……말해.”

“뭘?”

“시치미 떼지 마.”


물어봐야 해. 다짐하자 옷깃을 잡은 츠카사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꿈이라기엔 너무 섬뜩하게도 현실감이 느껴지고, 현실이라고 인정하자니 심증뿐인……, 부여받은 배역에 집어 삼켜지면서 완전히 모호해져 버린 할로윈 밤의 기억에 대해. 유일한 증인일지도 모르는 인물에게, 이제는 진실을 들어야만 한다.


“나……, 혹시 어젯밤에 뭐 했어?”


부끄러운 고백을 털어놓듯 볼품없는 목소리가 적막한 방에 울려 퍼진다.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맞춰 오던 루이는, 별안간 입을 가리고 소리 내 웃기 시작한다.


“아하하, 하하……! 재밌는 소리를 하네, 츠카사 군. 전-혀 영문을 모르겠어.”


웃음이 곧 잦아든다. 루이는 제 멱살을 잡은 츠카사의 손을 감싸 쥔다. 살과 살이 맞닿자 한껏 긴장해 있었던 츠카사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제대로 된 히터 하나 없는 방은 칼바람을 막는 정도가 고작이었고, 내내 얇은 후드 하나만 걸친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루이의 손은 다소 차갑다. 감정이 격앙된 탓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뜨겁게 달아오른 제 손과는 대조적이다.


“……네 아이디어 덕분에, 어제 공연은 대성공이었어.”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까. 루이는 오랜 침묵 뒤에 마침내 운을 뗀다.


“그야 이런 줄거리의 쇼는 흔치 않으니까. 피닉스 원더랜드 같은 장소에서는 특히 더.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막이 오르자, 관객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우리에게 찬사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어. 환호 속에서 모두 같이 손을 잡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 스테이지 아래로 내려와서 연극 의상을 벗어던지고 분장을 지운 뒤에 사복으로 갈아입었어. 스테이지를 간단하게 청소한 뒤에 네네나 에무 군이랑은 먼저 헤어지고, 너는 귀갓길에 우리 집에 들렀다가 그대로 잠들어서 여태 소파에 누워 있었던 거야.”

“여태……, 그냥 여기서 뻗어 있었다고? 가족들한테 말도 안 하고? 저녁도 안 먹고?”

“뭐, 방전됐었나 보지. 넌 유독 심혈을 기울여서 이번 쇼 준비를 했으니까 무리도 아니야. 그리고 나는 네가 자는 동안 쭉 여기 앉아서 연출 장치 몇 가지를 손보고 있었어. 아, 너희 집에 연락은 해 뒀으니까 부모님도 걱정은 안 하실 거야.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루이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옷깃을 잡은 손에는 어느새 힘이 풀려 있었다. 거친 손길이 멱살을 뿌리친다. 탁, 쌀쌀맞게 내쳐진 손이 허공을 멍하니 방황한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구겨진 옷깃을 대충 정리한 루이는 침착하고 차분한, 하지만 마냥 무겁지도 않은 평상시의 어조로 문장을 완벽하게 마무리 짓는다.


“……아무 일도 없었어. 전혀.”


교묘하고도 철저한 목소리다. 사전 속 단어의 정의를 읊듯이 빈틈도 급소도 없다.

츠카사는 갈 곳 없던 손을 들어 두 눈을 비빈다. 떠올릴 때마다 흐려지기만 하는 환상적인 장면들을 되짚는다. 자신이 곧 주역이고, 주역이 곧 자신이었던 시간의 편린이 뇌수 속에서 산산이 흩어진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꿈, 혹은 환각이었을까. 루이의 말을 믿고 싶다는 안일한 생각과는 별개로, 본능적인 불신은 자꾸만 말대꾸를 낳는다.


“그, 그럴 리가 없어……. 나, 중간에 깨거나 하지 않았어? 몽유병 같은 건? 너 할 일 하는 사이에 어디 안 나갔다 왔어? 진짜로?”

“츠카사 군.”


부드럽게 제 어깨를 부여잡은 손이 미지근하다. 츠카사는 얼어붙은 채로 루이를 올려다본다.

맞닿은 몸에는 체온이 옮겨붙었지만, 저를 응시하는 시선은 눈에 띄게 차갑다. 다음 문장은 어린아이를 엄하게 타이르듯 아주 천천히 흘러나온다.


“어젯밤엔,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러니 그 이상은 묻지 마. 부드러운 목소리 뒤에서 어렴풋한 단호함이 전해져 온다.


“하지만……,”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겨우겨우 말머리를 꺼낸 츠카사의 무릎 위에 담요를 덮어 준 루이는 지친 파트너의 등을 상냥하게 쓰다듬는다.


“……알겠지? 아직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 이제 어서 다시 자, 아침에 깨워 줄게.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일어나면 훨씬 나을 거야.”


긴장이 풀리자 자연히 현기증이 몰려온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분명……, 아주 불길한 일이……, 그게……, 뭐였더라. 완결되지 못한 문장들을 목구멍 뒤쪽으로 삼킨 츠카사는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어 스르륵 눕는다. 무거운 눈꺼풀을 그대로 내려 닫는 순간, 꿈속처럼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어제 연기는 상상 이상으로 좋았어. 지금껏 본 중에서 가장……,”